12년 간의 미국 한 가정의 일상 속에
모든 것을, 그저 잔잔하게 녹여낸 영화입니다.
12년간 실제로 어린 배우들이 커가는 과정, 성인 배우들이 늙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담아낸 놀라운 영화가 보이후드입니다. 우리들의 일상이 대개 그렇듯이 TV 뉴스에 오르내릴법한 커다란 사건이나 충격적인 일들은 이 영화에 없습니다. 자극적인 오락거리를 찾는다면 이 영화의 팬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영국의 국영 TV, BBC 가 선정한 21세기 최고 영화 100선에서 5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지 알아보려 하는데, 영화의 제목과는 달리, 메이슨을 키운 엄마의 시각에서 풀어 보고자 합니다.
젊은 엄마 올리비아, 엄마 노릇
영화 초반부에, 어린 두 아이의 엄마 올리비아는 나가 놀자는 남자친구와 싸우면서 엄마로서의 책임, 엄마로서의 의무를 소리높여 외칩니다. 두 아이의 친부가 그랬듯이 남자친구 역시 부모로서의 의무와 책임은 외면합니다. 갑작스러운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포기했던 학업을 다시 시작하고 학위를 따내기 위해서 젊은 엄마 올리비아는 노력합니다.
아이들은 원치 않는 이사를 하고, 급작스러운 전학을 반복합니다. 어느 날에는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살던 집에서 도망치기도 합니다. 자신과 아이들의 인생에 무엇이 절실한지 알고 있는 엄마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두 번째 결혼도 전혀 아름답지 않게 끝나지만 올리비아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얼핏 스쳤던 사람에게도 최고의 칭송을 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다만 그녀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아이들의 친부, 재혼했던 남편들과 자식들)은 그런 올리비아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딱히 남달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의 친부, 그리고 재혼과 삼혼
아이들의 친부, 메이슨 시니어는 가정에 정착할 뜻이 없는 사람입니다. 책임지어야 할 아이가 생겨나자 가정을 버리고 사라집니다. 그래도 기회가 되는대로 찾아 와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나름 아빠 노릇을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는 올리비아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합니다. 혼자 고생하는 올리비아에게 재정적인 지원 따위는 할 생각도 없으면서 말만 앞서는 사람입니다.
대학 교수인 두 번째 남편 빌은 아이들의 친부와는 달리 매사 계획을 세우고 책임이나 의무만을 중요시합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린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린 아이들을 늘상 추궁하며 생활을 통제하고 억압합니다.
어린 메이슨을 헤어샵에 데려가 교도소 죄수와 같은 스타일로 머리를 밀어 버리게 하는 장면에서 그의 성향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자신는 알코올에 중독되어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쓰레기 남편일 뿐입니다. 올리비아는 아이들과 맨몸으로 탈출합니다.
끝내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올리비아에게 이라크 전쟁에서 갓 돌아온 젊은 제자가 다가서자 그녀는 다시 결혼을 합니다. 이 3번째 남편은 이미 십대 후반의 다 자란 아이들에게 ‘내가 어렸을 때는’을 연발하거나 ‘진짜 남자다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려 듭니다. 역시나 오래 가기는 어려운 결혼생활입니다.
성인이 된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그후
막내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떠나는 파티에서, 올리비아에게 관심을 보이는 4번째 남자가 등장합니다. 현실의 모든 것이 다 변해가고 달라지며, 이제 빈 둥지이지만 삶은 계속되니까요. 성인이 된 메이슨이 드디어 친부에게 묻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엄마 올리비아는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업을 갖고, 평생 노력하며 아이들을 키워내는 등 제법 성공에 가까운 삶을 살았지만 막내 아들을 대학으로 떠나 보내면서는 눈물을 보입니다. 그저 아들과의 이별이 슬퍼서가 아니라, 삶에는 그래도 뭔가가 더 있을 줄 알았다면서.
영화를 다 보고나면 왜 이 영화가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자연스레 수긍이 갑니다. 평범한 한 가정 4명의 12년 간의 삶을 통해서 현대 미국 사회의 정치, 종교, 전쟁, 남미 이민,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 청소년 문제, 교육, 이혼, 심지어 총기문제까지 거의 모든 것들을 총망라하여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잔잔하게 보여 주면서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그저 보고 느끼고 깨닫게 하면서 영화는 심심하게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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