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강박인들 치유하지 못하랴,
사랑만 있다면…
극심한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작가 멜빈 유델은 이웃집 화가 사이먼의 말대로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지 못합니다. 직업이 로맨스 소설 작가이며,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에 대해 갖는 열망, 사랑하는 이를 향하는 여자의 절절한 마음 등, 최고의 사랑이야기 작가로서 그는 이미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있음에도 그의 현실은 황폐한 사막이고 메마른 황무지입니다.
사랑에 빠진 인간의 마음을 어쩌면 그토록 절절하고 아름답게 쓸 수 있는 사람이면서도 그는 사랑은 고사하고 개 한 마리 키우지 못할 만큼 가족이든 이웃이든 심지어 자신의 정신과 상담 의사와도 거리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는 극심한 강박 장애를 앓고 있는데, 청결이나 위생에 대한 강박, 특정 무늬에 대한 강박, 사람의 접촉을 거부하는 강박, 안전에 대한 강박 등등, 없는 강박을 고르는 것이 더 빠를 지경입니다.
그는 상상을 불허하는 독설, 주변에 대한 무관심, 동정심이나 배려가 없는 막말과 행동을 거듭합니다. 미움과 차별과 편견으로 가득한 그의 마음에서 자연스레 독설과 미움과 차별과 편견의 말들만 튀어나옵니다.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전혀 모르는 독자들을 제외하고는 멜빈은 주변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환영받거나 사랑받거나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당사자 멜빈도 개의치 않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강박에 철저히 의지하면서.
그런 그에게 뜻밖의 인물이 뜻밖의 이유로 그를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그가 식사를 해결 하기위해 늘 들리는 이웃 식당의 웨이트리스 캐롤. 덥석 멜빈의 허리를 붙잡으며 따뜻하고 살갑게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멜빈의 독사 같은 독설도 선을 넘는 무례함과 제멋대로의 행동도 어지간하면 참아주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이런 사람인 것은 그녀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아팠던 아들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캐롤의 아들이 아프면 식당에 출근하지 못하고, 자신이 찾는 유일한 식당에서 캐롤의 음식 서빙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두려운 멜빈은 훌륭한 소아과 의사를 소개 시켜주고 치료 비용도 대신 지불해줍니다. 단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웨이트레스로부터 서빙을 받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실제 그 식당의 다른 모든 웨이트리스들이 멜빈에게 음식 서빙하기를 극도로 싫어합니다. 멜빈 자신도 우연히 새로온 웨이트리스의 서빙을 받았다가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친절한 행동 하나로 인해 멜빈은 그 자신으로부터 구원 받게 되고, 오래고 질긴 강박 증상들로부터도 구원됩니다. 캐롤을 마구 사랑하게 되어서, 또 캐롤의 아들이 불쌍해서 했던 행동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캐롤의 사랑도 얻게 되었고 자신의 삶도 다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멜빈의 강박 증상들은 자연스레 사라지는데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됩니다. 이런 일이 의학적으로 말이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게 이 영화가 또 우리가 궁금해 할 부분도 아닐 겁니다.
멜빈도 스스로의 삶이 괜찮지는 않았을 터입니다. 자신의 성격이 그러하고 조용히 글을 쓰는 직업도 그러하고, 강박에 시달리다 보니 그렇게 살았을 뿐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 한편으로 대개의 사람들이 원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방식대로 그저 살아갑니다. 그러는 와중에 사랑이 찾아 오면 그건 여러가지 문제들이 해결되고 많은 고통들이 사라지며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의 원천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 그 뿐일 것입니다.
영화 중간에 아주 짧게나마, 그의 강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사가 나옵니다. 멜빈의 아버지는 무려 11년간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고 살았던 문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멜빈이 피아노를 칠 때 실수를 하면 나무자로 아들의 손가락을 때렸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사람의 아들이니 주인공 멜빈이 다정하고 배려있고 웃음이 많은 사람으로 성장하기 쉽지 않았겠다고 얼핏 짐작은 됩니다. 성인이 된 이들이 겪는 정신적인 문제들이 애초에 그들의 문제 부모로부터 발단되었다고 간단히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아, 그것이 원인이었겠다고 짐작이 되는 유일한 단초로 등장합니다.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스럽게 하며 삶을 고난으로 만드는 것들의 대척점에 배려, 이해, 인내, 관대함이 있습니다. 증오, 혐오, 학대, 배척, 차별의 대척점에도 마찬가지로 돌봄, 소통, 확장, 사랑과 받아들임이 자리합니다. 어쩌면 멜빈의 강박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무의식의 벌은 아니었을까요 ? 자신의 성숙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행동 양식에 대해서 무의식으로는 잘 알고 있기에 강박적인 여러 증상들로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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