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1990년대, 한국 바둑계에는 패배를 모르는 바둑의 황제 조 훈현이 있었습니다. 조 훈현 9단은 냉철한 전략가이자 완벽주의자였으며 또한 훗날 자신을 가르친 스승을 이겨버린 제자, 이 창호의 스승입니다. 조 훈현 9단은 기본 위에 또 기본을 다지며 하나하나 천천히 정석대로만 쌓아 올라가라고 가르치는, 엄하고 고집스런 스승입니다. 반면 어렵고 까탈스러운 스승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며 그에게 한 점 한 점을 배워나가는 어린 이 창호는 천재적 감각과 고요한 야성을 뚱한 표정아래 감추어 두고 있는, 말없는 돌부처 같은 제자입니다. 바둑 영화 '승부'는 이 두 바둑 기사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치열했던 승부 경기들을 보여줌과 더불어, 스승을 넘어서고 싶은 제자의 인간적인 갈등과, 제자에게 질 수는 없는 스승의 극심한 부담감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영화는 고요하지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둑판 앞에서 시작됩니다. 천재 바둑소년 이 창호(유 아인 분)는 조훈현(이 병헌 분) 9단의 제자가 되어 훈련을 받기 위해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숙식과 단련을 함께 하며 생활합니다. 만 9세였던 1962년, 일본 기원에서 입단하여, 198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조 훈현은 바둑계의 신으로 불리며 무패 신화를 이어가는 인물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냉정하게 바둑판을 읽고 승부를 계산하여 상대를 공격하는 바둑을 둡니다. 정석대로 싸우고 그 싸움을 통해 승리를 쟁취합니다. 반면 제자 이 창호는 스승의 훈련을 견디어 내며 한편으로 자신만의 바둑 세계를 일구어 가면서 눈부신 속도로 성장하고, 어느 덧 한국 바둑의 새롭고 독보적인 신예로 떠오릅니다.
무서운 속도와 실력으로 뻗어나가는 제자가 스승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엔 깊은 긴장감과 경쟁 관계로 인한 불편감이 자리 잡습니다. 제자는 자신보다 앞서있는 고수들의 수를 모방하는 데에서 벗어나 굳이 싸우지 않고도 승리를 가져오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확고한 바둑 스타일을 세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스승에게서 배운 대로가 아니라, 스스로의 연구대로, 스스로의 고민대로, 자신만의 바둑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스승 조 훈현은 그런 제자의 갑작스럽고 초스피드의 성장을 다소 경계하면서도 내심 자랑스러워합니다. 동일한 분야에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한에는 피할 수 없는, 공식 대국 최종 경기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앉게 됩니다. 온 나라의 관심과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마치 둘의 인생 전체를 건 듯이 보이는 한 판 진검승부가 펼쳐집니다.
바둑판의 승부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스승 조 훈현은 자신이 가르친 제자 이 창호에게 패배합니다. 조 훈현은 심하게 상처받은 자존심 속에서 현실과 부닥치며 얼마 동안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기 어려워 겉돌며 방황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스승을 뛰어넘어버린 제자 이 창호는 주변 원로들과 바둑계 인사들로부터 마치 파렴치한이라도 된 듯한 거부반응에 부딪히게 됩니다.
주요 등장인물
- 조훈현(이병헌 분): 바둑계를 두루 평정하여 황제, 그야말로 바둑의 신의 자리에 오릅니다. 철저한 계산과 판단 위에 전략을 세워 수십 년간 정상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만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를 키워냈고, 결국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는 날을 맞이합니다. 이제 무관의 스승 조 훈현은 신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지만 다시 바닥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 끈기와 열정을 지닌 기사입니다. 자신이 가르친 제자에게 패배한 원인을 찾아 내야만 했고 또 다시 승리할 훗날을 대비하기 때문입니다.
- 이창호(유아인 분): 타고난 직감과 게임판을 읽고 싸우지 않고 상대를 제압하는 게임 감각을 가진 천재 바둑소년으로 평가받습니다. 어린 나이에 조훈현의 제자로 들어가 훈련 받으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성장해 나갑니다. 스승에게 배웠으니 스승을 닮았지만, 스승과는 다른 방식으로 바둑을 보고 자신의 세상을 열어가는 인물입니다.
- 김성진(김성균 분): 바둑 해설가로 등장합니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사이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하게 되는데 두 사람의 피할 수 없는 긴장과 승부감정 사이에서 관찰자이자 해석자로서 자리합니다. 또한 두 사람의 바둑의 신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작품평가
'승부'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둑 대국들을 스크린에 펼쳐 보이면서 그 안에서 이기고 지는 인물들의 심상과 갈등을 그려 나갑니다. 한국 바둑사에 다시 없을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승패의 기록도 관객들에게 커다란 흥미와 집중을 유발합니다. 각 등장인물들의 인간적인 성장과 변화,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인생의 돌들이 그야말로 작은 바둑판 위에서 한 점씩 한 점씩 놓여집니다. 이 병헌과 유 아인은 대사도 많지 않은 채, 얼굴과 표정만으로 각기 내면에 안고 있는 부대김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기대와 애정을 어쩌지 못하는, 우리네 수많은 인간군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단 한 수의 돌에 평생의 수련과 공부가 담겨 있으니 그야말로 수십 년의 시간과 무게가 담긴 바둑돌을 들어 바둑판에 내려놓습니다. 바둑 자체를 잘 모르는 관객일지라도 인물 간의 심리전과 긴장감에 숨을 죽이며 공감하게 됩니다. 작품은 바둑판이라는 작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인간이 가진 거의 무한한 정신세계가 어떻게 펼쳐지며 앞으로 나가는지, 때로 차갑게 때로 코믹하게 보여 줍니다. 단단하고 조용한 바둑돌과 바둑 경기처럼, 조용히 울리는 여운을 남기는 영화입니다.
'승부'는 표면상으로는 전설 그 자체인 스승과 어린 천재 제자의 엄혹한 맞대결입니다. 조치훈은 제자와 바둑을 두는 와중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몰입 상태로 인해 코피를 흘리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세대 교체를 바탕에 깔고 승부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멋진 영화입니다. 조용히 앉아 돌을 판 뒤에 내려놓고 있지만, 전쟁과도 같이 치열하게 오고 가는 바둑돌의 한 수 한 수 싸움 속에서, 관객은 인생의 길목에서 마주하는 선택과 관계, 그리고 성장의 의미를 반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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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지블 워먼(Invisible woman)’ 숨겨진 아내, 숨겨진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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